수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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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인 [ 짧은 글 / 수필 / 붓펜 그림 / 일러스트 / 펜화 ]
두 노인이 걸어간다. 두 노인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한 명은 두발로 엉거주춤 보행기에 의지하며, 한 마리는 네발로 느릿느릿 무거운 박자를 맞추며 걷는다. 한 마리는 젊었을 때의 요란한 발걸음은 아니지만 보행기에 의지한 동행에 비해서 빠르게 움직인다. 자기가 좀만 빨라졌다 싶으면 살짝 뒤를 돌아 동행을 확인하고 기다려준다. 그렇게 둘의 속도는 묘하게 타이밍이 맞는다.
2023.12.04 -
피아노와 소녀 [ 짧은 글 / 수필 / 붓펜 그림 / 펜화 / 일러스트 ]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에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피아노 위엔 한 문장을 담은 팻말이 있다. '마음껏 재능을 뽐내세요.' 차려놓은 무대 위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더벅머리에 교복을 입은 한 남학생이 피아노에 앉았다. 그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최신 걸그룹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광장에 울려 퍼지는 연주가 한 꼬마 소녀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듯했다. 꼬마는 학생의 연주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남학생의 연주는 주변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점점 더 자유로워졌다. 이 한 장면이 두 사람에겐 전환점이 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순간 이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두 피아니스트의 이야기. 그들의 모습을 잠깐 보다가 난 다시 내 갈 길을 갔다. 20..
2023.11.29 -
붓펜 그림과 짧은 글 ~ 할아버지의 뒷 모습 - 2016년 9월의 어느 날
9월의 어느 날. 아직은 시원하다고 할 수 없는 저녁 산책길. 내 옆으로 한 노인이 바쁘게 스쳐 지나간다. 하얀 머리와 깡마른 체구의 노인. 한 손에는 아가들이 탈 만한 자전거가 들려있었다. 이 길 끝에 있는 어린이집이 생각났다. 분명 손자를 데리러 가는 할아버지 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인의 발걸음은 내가 도저히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손자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 발걸음에 담겨 있었다. 곧 오르막이 나왔다. 노년으로 향하는 그의 관절은 오르막이 꽤나 버거운 것 같았다. 이내 그는 나에게 따라 잡혀 뒤처지고 말았다. 오르막이 끝나니 내리막이 나온다. 다시 뒤에서 끌려가는 자전거 바퀴 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곧 노인은 나를 제친다. 그렇게 우린 몇 개의 오르막과 내리막..
2023.11.26 -
인생에 한번 있었던 수능 시험날의 추억 - 엄마의 스웨터 [ 짧은 글 / 수필 / 읽을거리 ]
이맘때쯤에는 수능 한파라는 단어가 뉴스에서 많이 나왔었다. 날씨가 온화하다가도 수능날이 오면 거짓말처럼 추위가 닥치기 때문이었다. 올해 수능날인 오늘은 비교적 온화한 날인 것 같다. 무려 비도 오고 말이다. 내가 수능시험을 봤던 2005년의 수능날은 역시나 수능한파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매우 추운 날이었다. 난 미대입시를 준비 중이어서 다른 대다수의 입시생들에 비해서는 수능에 대한 부담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능은 정말 중요한 과정이긴 했다. 평균적으로 3등급만 나와도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서 꽤 많은 등수를 앞설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수능 전날에 느꼈던 감정들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이제까지 그 하루의 시험을 위해서 학원 다니고 공부했던 시간들이 갑자기 하얗게 변한 것처럼 허무하게 느껴졌다. 당장 ..
2023.11.16 -
겨울 일러스트 Winter Illustration 나만의 겨울 이야기 [ 그림 / 드로잉 / 습작 / Art work / Digital Drawing ]
내가 그림을 그릴 때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집에도 그림 작업을 하기 위한 세팅이 모두 되어 있지만 집이라는 환경에서 창의력과 집중력을 발휘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자주 가는 카페는 집 근처도 아니고 지하철을 타고 3~40분가량을 이동해야 하는 가락시장 쪽에 있다. 문정동 ~ 가락시장 부근은 어릴적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추억이 많은 동네이다. 추억을 쫓아 그쪽으로 몇번 갔다가 매장도 넓고 콘센트도 많아서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지역 자체가 나의 어린 시절을 되새기게 해주는 곳이라 그런지 그런 감성이 필요한 작업이 정말 잘되는 곳이었다. 첫 방문이 언제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2019년 경일 것 같고 단골처럼 자주 드나든 시기는 그 해 말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러..
2023.11.12 -
짧은 회사 생활 ~ 미생 체험기와 애증의 대표 이야기 + 캐릭터디자인 외주 - 쿠디 / 단지 + 구디지마켓 [ Character Design ]
나의 미생 체험기와 애증의 대표 이 블로그에도 2021년에 다녔던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언급했다. 11개월 동안 다니면서 참 많은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안 좋은 경험이 많은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준 게 더 많았다. 일단 난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 대학교를 막 졸업한 시점을 빼면 어떤 회사에 입사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21년에 다녔던 그곳도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간 게 아니라 회사인 줄 모르고 들어간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직원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 이야기 자체가 긴 이야기라... 정리하긴 어렵지만 이 게시물로 약간만 풀어보고자 한다. (회사의 모든 이야기를 다 담기엔 내용이 너무 길기에...) 일단은 내가 회사에 있으면서 만들었던 캐릭터를 보여..
2023.05.21 -
펜로즈의 계단을 오르는 듯했던 10년
올해 초... 굉장히 길게 느껴졌던 나의 첫 책 작업을 끝냈다. 완성을 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의 감정을 잊지 못한다. '드디어 내가 무언가를 하나 만들었구나.'라는 뿌듯한 느낌. 하지만 그 감정이 오래가진 못했다. 책이 실제로 나오기 전까지 몇 달간은 내 생각과는 다른 여러 시행착오들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아무튼 그런 과정들을 거쳐 내 인생에 첫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책에 들어가는 내용을 다 완성하고 나서는 제작과정에 내가 할 일은 끝난 상황이었다. 나머지 과정은 책의 디자인과 편집 그리고 어떻게 판매할 것인가와 같은 외부 요소였다. 그 시기에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됐다. 이제 막 무언가를 끝냈는데 다음에 뭘 해야 할지가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때 티스토리에 새로운 블로그를 ..
2023.04.28 -
빛이 전해준 이야기 [ 감성 사진 / 수필 / 짧은 글 / Art photo ]
2019년 봄이 오기 전 2월.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빛을 주제로 한 사진 공모전이 있었다. 이전에 몇 번 사진 공모전을 참여하면서 몇 가지 사진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이 공모전에 활용하기 좋다고 생각했다. 나의 아이디어는 창문과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와 노트를 비추는 모습이었다. 이전에도 머릿속 이미지를 그림 그리듯이 사진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선호했기에, 이번에도 내 머릿속 이미지 그대로 사진에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생각한 느낌에 걸맞는 창문이 필요했는데, 그걸 위해서 서울에 여러 카페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주말마다 정말 많은 카페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결국 삼청동에 있는 힛더스팟 베이커리라는 카페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내 생각과 어울리는 창문을 발견했다.(지금은 매장이 ..
2023.04.12 -
서랍 속에 크레파스 그림과 미술학원 - 난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을까?
가끔씩 낡은 서랍을 뒤지고 싶을 때가 있다. 보통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서랍을 뒤지게 된다. 얼마 전에는 서랍 안쪽을 뒤져보다가 비닐봉지에 쌓여있는 딱딱한 물건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 부피는 크고 딱딱해서 내가 무언가를 찾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손에 뭔가가 걸려서 뒤지는 게 힘들어지면 서랍 속의 물건들을 몽땅 빼놓게 된다. 그리고 그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열어봤다. 서랍을 뒤지는 일은 이렇게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면서 잠시 중단하게 된다. 낡은 서랍속은 마치 나의 머릿속과 같을 때가 있다. 분명히 친숙한 물건이지만 기억 저 구석으로 처박아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는/ 꺼내지 않을 물건들... 이 오래된 상패가 그런 물건이었다. 어쩌다가 발견하게 되면 내 머릿속 한 구석에서 전류가 ..
2023.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