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5. 23:56ㆍ잡담
가끔씩 낡은 서랍을 뒤지고 싶을 때가 있다. 보통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서랍을 뒤지게 된다. 얼마 전에는 서랍 안쪽을 뒤져보다가 비닐봉지에 쌓여있는 딱딱한 물건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 부피는 크고 딱딱해서 내가 무언가를 찾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손에 뭔가가 걸려서 뒤지는 게 힘들어지면 서랍 속의 물건들을 몽땅 빼놓게 된다. 그리고 그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열어봤다.
서랍을 뒤지는 일은 이렇게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면서 잠시 중단하게 된다. 낡은 서랍속은 마치 나의 머릿속과 같을 때가 있다. 분명히 친숙한 물건이지만 기억 저 구석으로 처박아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는/ 꺼내지 않을 물건들... 이 오래된 상패가 그런 물건이었다. 어쩌다가 발견하게 되면 내 머릿속 한 구석에서 전류가 흐른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기억들을 끄집어 낸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 안방 TV옆 탁자에 늘 세워져있던 상패였다. 이 상을 언제 받았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시상식의 순간들은 파편처럼 남아있다. 굉장히 큰 무대에 많은 아이들이 있었고, 순서대로 상을 받아가던 장면들. 상을 받고 언제 악수를 하고 언제 인사를 해야 하는지, 먼저 나간 아이들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 올랐고,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던 순서들은 뒤죽박죽 엉켰다. 난 올라가자마자 뒤를 돌아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는데, 그때 객석에선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무대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나의 모습이 마치 코미디 같았을 것이다.
내 기억엔 수많은 아이들이 그날 상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임팩트 있던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상장을 보니 어린 시절 다녔던 미술학원 이름이 눈에 띄었다. 내가 만 4세에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고보니 그 나이에 미술학원에는 왜 다니게 되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넌지시 미술학원에 가게 된 계기를 물어봤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다니고 싶다 했거나 아니면 내 재능을 보고 부모님이 보내셨거나... 어머니는 의외로 아주 디테일한 설명을 해주셨다. 당시 우리 집이 운영하던 가스가게의 고객 중에 하나가 저 미술학원이었는데, 내가 배달을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와서는 가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림을 향한 첫번째 길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이 그림 역시 기억이 난다. 심지어 그림을 그리던 순간도 기억이 난다. 미술학원에서 배운 것은 크레파스로 어떤 색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색칠하는지였다. 그림 속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저 생물체의 검은색 선 옆에는 얼핏 노란색이 보인다. 노란색이 연하니까 그걸로 스케치를 하고 검은색으로 깔끔하게 라인을 따는 순서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검은색으로 선까지 모두 완성하면 나머지는 색칠공부이기 때문에 편한 과정이었다. 그때는 삐져나오지 않게 색칠하는 게 정말 어려웠던 것도 기억이 난다. 만약 삐져나오지 않게 색칠을 하게 되면 그 그림은 명작 등극이었다. 확실히 저 코끼리 그림은 내가 그 당시에 그릴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저 그림도 한동안 우리집 안방 벽에 붙어있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낡고 찢어졌다. 그 외에 미술학원에서 그린 많은 그림들이 찢어지고 결국 버려졌다. 이렇게 작은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는 저 한 점의 그림이 현재로서는 정말 소중하다.
상패에 있는 작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친숙한 그림이지만 낡은 서랍속에 그리고 내 머릿속 한 구석에 숨어있던 세월은 20년이(어쩌면 30년이...) 넘을 것이다. 이 그림이 내 눈에 다시 들어오는 순간 난 그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마치 최면에 걸리듯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의 난 그림을 그릴 때 무슨 감정이 들었는지,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 어렴풋하게 엿볼 수 있었다.
지금 시점의 나에게 아주 중요한 자극이었다. 스케치북을 펴고 책장에 꽂힌 크레파스 상자를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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