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8. 23:57ㆍ작업일지/그림 일러스트
어릴 때, 환상을 가졌던 미술 재료라고 하면 여러 개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마커를 꼽을 수 있다.
마커라는 재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릴때 즐겨보던 게임잡지를 통해서였다.
잡지에는 매번 독자 코너가 있었고 몇몇 독자들은 엽서에 그림을 그려서 잡지사에 보냈는데, 일본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게임계 특성상 일본 애니메이션 느낌을 흉내 낸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 잡지를 통해 접한 그림들은 마치 셀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았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하던 나로서는 어떻게 저렇게 그릴 수 있는지 안 궁금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아는 미술 재료는 오일파스텔(크레파스), 색연필, 수채화물감이 전부였고 그런 재료로는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반짝이는 색감을 흉내내기 무척 어려웠었다.
그런데 잡지에 수록된 그림들은 분명 애니메이션의 색감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요즘이라면 궁금한 것은 스마트폰으로 바로 검색해보겠지만, 90년대 중반이었던 그 시기에는 인터넷도 소수만의 전유물이었고 난 컴퓨터도 없었다.
그러던 중 게임잡지를 통해 그 재료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매달 멋진 그림을 보내온 독자가 있었고 그 사람이 꽤 유명해지자 지면을 할애해서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소개하는 특집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쓰는 재료의 이름이 마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식 발음인 '마카'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지금도 마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꽤 많다.)
마커를 직접 만져보게 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고 입시미술을 할 때였다.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러 미술재료들을 사러 가야 할 일이 생겼었는데 그때 즐겨 가던 곳이 강남 고속터미널에 있는 한가람 문구센터였다.
한가람 문구엔 같이 입시미술을 하는 친구나 학원에 함께 다니던 선배 형들과 같이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내가 쓰는 재료 외에 다양한 미술 도구들을 구경하곤 했는데 그곳에서 어릴 때 꿈의 재료였던 마커를 보게 되었다.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과 달리 마커는 그냥 사인펜이었다.
이걸로 어떻게 그런 셀애니메이션 느낌을 내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선배 형들에게서 코픽이라는 회사의 마커가 유명하다는 사실도 듣게 되었다.
그때는 겉멋 때문에 나에게 필요도 없는 코픽 마커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입시미술에서 마커를 사용하는 일은 디자인 계열인 '발상과 표현'을 할 때 아주 가끔 있었는데, 난 디자인 계열도 아니었다.
내가 배우고 있었던 '상황표현'에서는 수채화 물감만이 필요했었다.
따라서 내가 마커를 산 것은 진짜 겉멋일 뿐이었다.
게다가 마커는 한 자루만 구매하려고 해도 거의 한 끼 밥값이었기에 꽤나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사놓고 좀 사용했다면 그나마 돈 값을 했을 텐데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몰라서 거의 새것 상태로 방치해 뒀다. (그나마 입시 때 애니메이션 전공이 없었던 가군 시험을 발상과 표현으로 지원해서 잠깐 사용할 일이 있었다.)
그 비싼 코픽 마커들은 내 화구통 안에서 아주 긴 시간을 잠들어있었다.
그리고 2018년에 코픽이라는 반가운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코픽에서 직접 개최하는 글로벌 그림대회 '코픽어워드'의 홍보물에서였다.
내가 여러 미술 공모전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였으니 당연히 이 대회에도 큰 관심이 생겼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미술을 할 때까지 선망의 대상이었던 코픽 마커를 이용한 대회라니... 정말 그 타이틀이 너무 탐났었다.
대회의 룰도 매우 간단해서 코픽 제품을 이용한 그림이면 응모할 수 있었다.
마침 10년 넘게 화구통에 잠들어있는 수많은 마커들도 있었다.
하나 문제라면 마커라는 재료를 사용해 본 적이 없기에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고등학생 때 샀던 마커들을 쫙 펼쳐놓고 종이에 하나씩 그어가며 재료를 탐색했던 기억이 난다.
종이 뒷면까지 번져 나오는 잉크에 당황해서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뒤늦은 마커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마커 용지와 몇 가지 색을 더 구매해서 처음으로 마커 그림을 완성했다.
2018년 대회를 패스하고 2019년이 되어서야 완성하게 된 첫 마커 그림.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서 사진을 따라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삼청동에 갔다가 찍은 한옥 건물을 그렸다.
마커를 그을 때 종이에 잉크가 스며드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처음 그린 마커 그림이지만 아주 만족스러웠었다.
물론 코픽어워드에서 상을 받을 거라 생각은 전혀 안 했고 결과 역시 예선 탈락이었다.
응모작들은 모두 볼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이미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굉장히 많았었다.
코픽 마커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아직도 코픽 어워드가 열린다고 하면 관심이 쏠린다.
코픽 어워드 시기 외에는 마커를 여는 일이 없다.
평소에도 연습을 해보면 꽤 실력이 붙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도 코픽어워드에서 내 목표는 1차만이라도 통과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