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지마' 고슴도치 딜레마와 양가 감정 [ 일상 잡담 ]

2024. 8. 27. 13:27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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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금요일(8/23), 하루의 끝이 다가오는 밤. 만화 진흥원으로부터 다양성 만화 지원사업 중간평가에서 '통과'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루 종일 결과를 기다렸지만 밤늦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에 결과는 다음 주에나 나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당연히 통과가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결과를 마주하니 은은한 흥분감 때문에 작업에 더 손이 가질 않았다. 어차피 늦은 시간이기도 해서 이날 작업은 마치고 산책이나 좀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사무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기분이 좋아서 이대로 한강까지 걸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올때는 오랜만에 치킨 한 마리 포장해서 다 먹어치워야겠다고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내가 사무실에서 나와 매일 산책하는 코스가 있다. 대로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에 서초구와 동작구가 닿아있는 사당역-이수역-동작역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길이자체도 산책에 딱 맞고 고저차가 없어서 좋다. 하지만 금요일 밤에 걷다 보면 동작구 사당동쪽은 무척 번잡하다. 술 취한 사람들이 자신의 어깨가 좁던 넓던 상관없이 쭉 펴고 다닌다. 그 거리에 이성적인 사람은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내 어깨를 반쪽으로 접어서 다녀야 한다. 반면에 서초구 방배동 쪽은 산책하는 동네 주민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난 주로 방배동쪽 거리를 걷는다. 

 

 방배동은 몇년 전부터 쑥대밭이 됐다. 시작은 한창 부동산이 폭등하던 시기였다. 방배동은 서초구에서도 꽤 오래전 풍경을 많이 간직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출입금지 테이프가 마을 골목 초입에 붙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오래된 풍경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사당역에서 이수역까지 이어지는 방배동은 아직 예스러운 주택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걸을 때면 길고양이를 꽤 볼 수 있다. 금요일 산책에도 길고양이를 만났다.

 

 

 사람의 시야각은 수평 180도, 수직 120도 라고 한다. 그러니까 수평은 양쪽에 90도... 직각까지 눈에 잡힌다는 것이다. 아마 이 길냥이 녀석은 내 우측 85도 정도 위치에 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웬 유령이 나타난 느낌이랄까. 까만 풍경에 하얀 물체 하나가 덩그러니 쓱 스쳐가는 느낌이었으니... 내가 뭔가를 봤다고 인지할 때쯤에는 이 녀석이 내 우측 후방 100도 정도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난 뒤를 돌아봤다. 빌라 앞에 덩그러니 멈춰있는 고양이. 그렇다... 녀석은 귀여웠다.

 

 난 발걸음을 돌려 녀석에게로 향했다. 아주 천천히.... 몇발자국 가까이 가도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마트료시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난 깨달았다. 더 가까이 가면 고양이가 도망갈 것이라는 것을. 고양이의 포즈는 매우 평안해 보였다. 하지만 내 한 발자국이 그 평안을 해칠 것 같았다.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평안을 위해서. 

 

 난 노래가 흘러나오는 유튜브를 잠시 끄고 카메라를 켜서 녀석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확대해서 다시 한번 사진을 찍었다. 평안한 모습. 그걸로 난 만족한다. 

 

 어느덧 이수역에 다다랐다. 내 산책로는 방배동 카페골목쪽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때 고등학교 때 동창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나보고 어디냐고 물었는데 그 순간 이 친구가 날 찾는 이유를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난 이수역이라고 대답했고 친구는 반가워하며 자기도 이수역인데 같이 걷자고 했다. 친구를 만나서 난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토닥거려 줬다. 친구는 어떻게 그걸 알아차렸냐고 했다. 

 

"몰라~ 맥주 사줄게. 치킨집이나 가자."

 

 혼자 치킨 한마리 다 먹으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그래도 금요일 밤에 함께 치킨 먹어줄 친구가 갑자기 생겨서 나도 좋았다. 친구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렇게 그날은 친구와 밤을 새우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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