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7. 00:51ㆍ작업일지/그림 일러스트
어디선가 이런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건담 프라모델을 보여주며)"ㅇㅇ이는 이런 거 좋아하려나?"
그러자 ㅇㅇ이 엄마의 대답.
"그런거 졸업한 지 오래됐다."
ㅇㅇ이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다.
나는 그 대화를 듣고 피식 웃었다.
졸업?..... Never....
어린 시절, 강렬한 추억 하나가 있다.
내가 살던 서초동 동네에 88문구라는 문구점 하나가 있었다.
작은 문구점이지만 그곳은 나에게 우주였다.
특히 내 손이 닿지 않는 선반 저 위에는 고가의 로봇 장난감들이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내 손에 닿지 않지만 심리적으로도 저 먼 곳의 물건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명절 연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부모님이었는지 아니면 친척 어른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당시 유행하던 '슈퍼 그랑죠' 로봇 장난감을 사준다고 약속을 했다.
그 당시 명절은 어린 아이였던 나에겐 너무나 지루한 날이었다.
동네 문방구나 오락실이 모두 문을 닫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정말 바쁜 날이다.
어른들은 차를 타고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빴다.
마침 우리동네 88문구점이 웬일로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슈퍼 그랑죠' 선물에 대한 기대를 안고 문구점 앞에서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바쁜 어른이 명절에 해야만 하는 일을 끝내고 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결국 문방구는 문을 닫았다.
문방구에 불이 꺼지고 나의 기대가 무참히 무너져 내리던 그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 이후로도 '슈퍼 그랑죠' 장난감이 내 손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게 지금은 옛날의 추억으로만 남아있느냐...
지금도 난 내가 좋아하는 로봇 장난감에 많은 돈을 투자한다.
로봇은 졸업할수 없는 것이다.
ㅇㅇ이도 분명 그 건담 프라모델을 좋아했을 것이다.
당연히 메카닉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문제는 로봇 그 자체가 그리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문화에 대해서 조금씩 친구들에게 듣고 알아갈 즈음에 일본에서는 '신기동전기 건담W'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같은 로봇 만화가 휩쓸고 있었다.(90년대 중반.. 그 시기에는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다.)
그때 일본 문화를 먼저 접해서 다른 친구들에게 전파하던 친구가 반에 꼭 하나씩은 있었다.
그 친구들을 통해 본 만화의 설정화나 캡쳐화면을 보고 있으면 정말 선진문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따라할수 없는.... 정확하게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그림들이었다.
그때부터 로봇을 열심히 따라 그렸다면 지금은 잘 그릴 수 있게 됐을까.
너무 일찍부터 저 그림들은 내가 범접할수 없다고 답을 내린 건 아닐까 싶다.
가끔 열혈 슈퍼로봇만화 느낌으로 작업해보려고 할때마다 꼭 파일럿만 완성하고 로봇은 일부분만 그리게 된다.
로봇을 잘 그리는 작가들을 보면 참 부럽다.
석양의 파일럿 202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