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 15:19ㆍ작업일지/그림 일러스트
2018년 봄, 대학교 1학년을 함께 보냈던 동기 형에게 제안 하나를 들었다.
그 형은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 새롭게 입시를 해서 한예종으로 다시 입학을 했었다.
그곳에서 다양한 인맥을 만났는 데, 그중에서 당산역에 갤러리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갤러리에서는 여러 실험적인 전시 위주로 운영되었고, 마침 전시 기간이 비는 동안에 함께 전시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 나는 제안을 거절했었다.
2018년엔 웹툰 작업을 중단하고 실력을 키울 겸 여러 공모전에 도전할 때였다.
전시를 하려면 작품에 대한 생각이 확실하게 자리 잡혀 있어야 하는데, 마치 경험 쌓듯이 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형의 말은 '전시 자체가 짧게 이루어지는 소규모이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음악 공연과 같은 퍼포먼스'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합동 전시회라기보다 그 형의 퍼포먼스를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와 한예종 출신의 형 그리고 대학시절 또 다른 동기 형까지 세 명이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시 주제는 '공간'
전시 준비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형이 공연 당일에 쓰려고 만든 음악들을 들어봤다.
음악을 들으니 어릴 때 한산한 놀이터에서 느꼈던 바람의 이미지가 생각났다.
땀 흘리며 놀다가 바람을 느끼고 마치 그 바람에 실려가 듯 멈춰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시각화해야 하느냐 고민을 했는데, 준비 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수성펜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내가 주인공은 아니니까 간단한 역할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뒤에는 형의 퍼포먼스를 위해서 필요한 영상 촬영을 도와주러 다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작가로서 전시회에 참여했다기보다 스텝 역할에 가까웠던 것 같다.
2018년 상반기에 짧게 참여한 경험이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즐거웠다.
전시준비를 했던 과정과 전시기간 동안 갤러리에서 자리를 지키며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던 것들.
작은 전시지만 구경하러 온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들 모두... 근처에는 선유도가 있어서 바람을 느끼러 가기에도 좋았다.
아래부터는 전시를 위해 내가 그렸던 풍화 시리즈이다.
음악과 함께 들어야 더 완성이 되는 그림들이다.
그래서 전시 현장에서 봐야 진짜 내가 생각한 의도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음악들은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어서 링크를 걸어두었으니 함께 감상하기를...
풍화 01 - 창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에 다른 세상과 마주하는 느낌이 든다.
늘 보던 풍경이 어느 날 새롭게 느껴지는 것.
시간의 변화.
공간의 이면.
풍화02 - 그네를 타면 바람이 돼 가는 기분.
더 강렬히 느껴지는 주변의 내음.
격렬하게 바뀌는 주변의 풍경.
풍화 03 - 아무도 없는 공간.
아무 생각없이 밖에서 들어오는 온기를 느끼며...
풍화 04 -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느껴지는 창가의 바람.
설레는 기분에 아직 잠에서 덜 깬듯한 아침.
풍화 05 - 계획 없이 떠돌다가 도달한 낯선 풍경.
낯선 공간에서의 사색.
풍화 06 - 푸른 나무와 흙길.
도시와 다른 풍경은 그 자체로 설레게 한다.
풍화란 말 그대로 공기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공간이라는 주제인 만큼 그 공간과 하나가 되어 가는 느낌을 담으려고 했었다.
전시회 스케치
SHOW
공간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가지고, 3명의 작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을 전시한다.
TELL
우리는 각자의 눈으로 각자의 세상을 바라보고 산다.
공간은 하나의 시간대 아래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곳이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절대적 공간과 주관적 공간은 서로 맞닿아 있다가도 어느새 멀어지기도 한다.
작가들이 바라보는 자신만의 세상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다.
SHOW_bunjim
소리가 있는 공간
누워서, 혹은 편히 앉아 쉬었다 가는 공연.
TELL_bunjim
공연은 너무 피곤하다 보는 것도 피곤하고 하는 것도 피곤하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것 투성인 세상인데, 맨날 집중을 요구한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지루함과 나른함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바란다.
빈 벽을 바라보며 잊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SHOW_영오
평면 그림 안에 미로와 같은 도심의 형태 그리고 식기 도구
TELL_영오
저는 직장인입니다.
정해진 칼 같은 시간과 너무 복잡한 도시의 빌딩 숲에서의 낯설었던 첫 사회에서의 식사는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풍경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식사가 익숙해진 후부터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제가 먹었던 음식이 사라지고 도구와 공간만이 생각나더군요.
이젠 익숙하지만 복잡한 기억의 공간, 이제는 어떻게 보면 편안하지만 묘한 느낌의 식사의 기억을 표현한 풍경화입니다.
SHOW_SouthLand
bunjim의 소리로, 영오의 컬러와 면으로, 그리고 SouthLand의 라인으로..
공간을 채우고, 공간을 만들어간다.
TELL_SouthLand
공간은 무엇일까?
공간은 냄새다. 공간은 시간이다.
공간은 바람이다. 공간은 음악이다.
공간은 날 행복하게도 하고, 우울하게도 한다.
공간은 날 불안하게도 하고, 안정되게도 한다.
공간은 날 현재에 머물게 하고, 또 과거로 보낸다.
어느 순간 난 공간과 하나가 된다.
액자 안 나의 공간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다.